너븐숭이 4.3 기념관을 나와 얼마간 걸었습니다. 그래야 마음을 추스를 수 있을 듯했거든요.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와 북촌에 부는 바다 바람. 춥지는 않지만, 여행자에게 그리 우호적이지 않은 하늘을 피해 찾아간 알마커피제작소(alma coffee). 오래된 2층 양옥집을 개조해 카페로 만든 이곳은 커피에 진심인 주인장으로 유명한지 카카오맵 리뷰도 꽤 긍정적이더군요. 커피맛을 세심하게 구분할 정도의 혀는 아니지만, 메뉴를 보니 강력 추천 중인 콜롬비아 마라카이 무산소발효 원두로 내린 핸드드립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더라고요. 저는 낯선 곳에선 그 집의 이익과 상관없이 안전한(?) 추천 메뉴나 시그니처를 선택하는 편이거든요.
한 잔에 7,500원이니 가성비와는 거리가 있지만, 핸드드립과 앙버터(팥버터) 크로플(3,500원)을 주문합니다. 1층보다는 뷰가 나을 2층으로 올라갔는데 계단이 꽤 가파랐어요. 오래된 주택을 개조하면서 생긴 문제가 아닐까 싶은데 계단 사용에 익숙한 분들이라도 살짝 주의가 필요해 보였습니다. 2층은 크게 테이블을 길게 놓고 4인씩 나눠 앉게 만든 자리와 창가 쪽에 붙인 테이블과 좌식 의자로 구성된 북촌 뷰 포인트가 있었는데... 2인 정도 앉기 적당한 자리지만, 뷰 때문인지 3분이 앉기도 하는 등 인기더군요. 3층에 루프탑이 있는 듯해서 비가 오는 중에 살짝 올라가 봤는데 아무것도 없더라고요.@_@;; 뭔가 날씨 좋을 때만 운영하실 듯.
그렇게 대충 내부를 둘러본 후 어디에 앉을까 고민을 해보고 싶었지만, 이미 창쪽이 다 차버린 상태여서 긴 테이블 한쪽에 앉아 스마트폰 충전을 하면서 책을 읽었는데요. 다양한 책이 있었지만, 제 손이 간 건 역시 제목부터 확 끌리는... '끝장난 줄 알았는데 인생은 계속됐다'였습니다. 한겨레의 양선아 기자가 쓴 책인데 유방암에 걸렸던 경험을 기사화 하고 그걸 다시 묶어 책으로 낸 거더군요. 그리고 표지를 슬쩍 들춰보니 이 카페에 방문한 후 직접 사인해서 놓고 간 듯. 아무튼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암이라는 병마에 그가 어떻게 맞섰는지, 아니 어떻게 암을 인정하고 해법을 모색했는지를 쭉 따라가면서 읽었네요.
그 사이에 진동벨의 울음을 따라 1층에 내려가 콜롬비아 마라카이 무산소발효 핸드드립(이름 참 길다;;)과 팥버터 크로플을 가져왔는데요. 향이 독특하다 했더니 커피의 특징을 정리한 명함 같은 종이에 이 원두의 특징으로 쌍화차가 쓰여있더라고요. 네. 이 커피 향이 쌍화차의 그것과 참 닮아있습니다. 미묘한 산미는 아마도 먹어보지 않았던 낑깡의 그것과 닮았을 듯하고 마찬가지로 미묘한 단맛은 황설탕을 떠올리게 했고요. 활자화된 커피의 특징을 읽으면서 스스로를 세뇌시키고 있는 걸까란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대략 비슷한 맛과 향이었습니다.
그렇게 책에 빠져 있는 사이 난 창쪽 자리. 후다닥(!!) 자리를 옮겨 비 내리는 북촌 바다를 바라보며 책을 좀 더 읽었네요. 물론 책을 끝까지 다 보진 못했습니다. 본격적인 항암의 시작까지 본터라 뒷 내용이 궁금하긴 하지만, 일단 작가는 자신의 경험으로 암이라는 갑작스러운 변고와 맞서야 하는 이들에게 마음가짐부터 실질적인 조언까지 챙기고 있어서 그런 상황의 환자들에게 추천해 줄 만한 책일 듯하더라고요. 언젠가 다 읽을지도.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렸지만, 절망에서 다시 희망을 일구려는 이의 삶을 엿본 거 같아서 조금 나아진 기분으로 알마커피제작소를 떠나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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