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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싱(가흥)에서 만난 백범 김구 선생 피난처와 남호, 안타까운 가족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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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싱시(嘉兴市). 우리식으로 읽는다면 가흥으로 읽히는 이 도시는 상하이와 항저우 사이에 있는 도시로 인구 337만 명 정도의 중국치고는 비교적 작은(?) 도시입니다. 상하이나 항저우에 비해 매우 낯선 이름의 이 도시를 이강민의 잡지사 x 썬킴 상하이 & 항저우 역사 스토리텔링 투어가 찾은 이유는 꽤 선명했는데요. 자싱은 백범 김구가 한인애국단을 만들고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은신했던 곳이거든요. 김구 피난처(金九避难处)가 존재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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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싱시 남호 옆에서 은거했던 백범 김구 선생님
역사 스토리텔러 썬킴님이 전한 그즈음의 한국과 중국의 상황을 좀 더 옮겨보자면 일제에 쫓겨 만주로 옮긴 선조들이 벼농사를 지으려고 저수지를 개발하면서 현지의 중국인들과 다소의 마찰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심각한 충돌은 아니었지만, 이후 일본의 농간과 조선일보의 오보로 1931년 7월 국내에서 중국인들이 죽임을 당하는 소위 만보산 사건이 발생했는데요. 당연히 중국 내에서 중국인들의 반한 감정이 커졌고 임시정부에 대해서도 더 우호적이지 않게 됐다고 하더군요.






그런 상황에서 일제에 항거하는 한인애국단 윤봉길 의사의 수통 폭탄 투척이 홍구공원에서 천장절에 이뤄졌고, 이 의거를 지켜본 국민당을 이끌던 장개석이 중국군 100만 명이 하지 못한 일을 1명의 조선인이 해냈다며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일제의 압박으로 프랑스 조계지에서의 더 이상 활동하기 어려워진 임시정부 인원들이 항저우로 이동하며 임시정부를 옮겨갔고, 김구 선생님은 그들과 함께하지 못하고 이곳 자싱으로 피신하게 됐다고 하더군요. 장개석의 요청을 받은 중국인 저보성이 그의 가족과 함께 김구 선생님을 숨겨주면서 그의 은신 생활이 시작된 거고요.






저보성의 양아들 진동생의 집 2층에 은신하신 김구 선생님. 올라가는 계단은 벽장처럼 숨겨놓고 바깥 상황을 살피다가 위험한 상황이 되면 2층 바닥 일부를 들어 올리면 나오는 구멍에 사다리를 내려 집 바로 옆에 있는 남호로 배를 타고 나가 피했다고 하는데요. 이후 상황을 진동생 부부가 걸어둔 빨래 색으로 알려 안전을 도모했다고 합니다. 당시 김구 선생님을 찾기 위한 밀정만 300명 이상이 자싱에서 활동했었다니 위험한 상황이 정말 많으셨을 텐데 다행히 비교적 잘 숨어 계셨던 모양이더라고요. 또 중요한 결정을 위해 임시정부에서 요원들이 찾아오면 이 집이 아니라 남호에 배를 타고 나가 배 위에서 회의를 했었다고도 하고요.






안타까운 건 지척에 김구 선생님의 모친이신 곽낙원 여사님과 김구 선생님의 아들이 살고 있었지만, 양쪽 모두 일제의 눈에 들지 않기 위해 숨어있는 상황이었기에 서로 지근거리에 있다는 것조차 모른 채 만나지 못하고 그리움을 키우셨을 거란 거죠. 이후 김구 선생님은 무려 9년 동안이나 뱃사공인 주애보와 위장 부부 행세를 하고 함께 피신을 다니셨다고 하던데. 현재의 남호와 김구 선생님이 은신하셨던 진동생 부부의 집은 고요하기만 했지만, 늘 일제의 눈을 피해 은신하면서도 대한 독립을 꿈꾸며 최선의 방법을 강구했을 김구 선생님의 모습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귀감이 되고 있죠. 최근 한류가 세계를 들썩이면서 문화의 힘을 강조했던 김구 선생님의 이야기가 새삼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그런 조국의 미래를 좀 더 확인하셨으면 좋았을 걸. 현장에서 만난 안타까움이 더 크게 마음에 남은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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